+약, 납치 소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기분 좋게 오르던 술기운이 단숨에 깨는 기분이 들었다. 목을 축이려 들었던 술잔을 감흥 없이 천천히 내려두며 애써 감정을 추스른다. 잔을 따라가던 무거운 시선이 다시 정 없는 말을 꺼낸 당사자에게 옮겨간다. 배시시 웃으며 별 수 없다는 양 눈썹의 끝을 기운 없이 늘어트리며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첫번째는 그런 사람을 세간에서 '귀찮은 여자'라고 표현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섹스파트너 같은 걸 그만두자는 이유 같은 건 묻지 않아도 가짓수정도는 쉽게 줄여나갈 수 있으니까. 내가 상대의 성적인 유희를 더 이상 채워주지 못한다, 혹은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 같은 이야기겠지. 전자라면 오히려 괜찮았다, 껄끄러워할 일도 아닐 테고 오히려 당신이라면 다음날에도 웃으며 내게 인사해올 테니까. 거기다 다른 상대를 만나도 묘하게 부족한 날에는 이전의 사람들처럼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는 저를 찾아올게 뻔했다. 기다리는 것도 잘하고, 모르는 누군가와 당신을 나누는 건 조금 서운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이어진다면 얼마든지 괜찮아. 하지만 후자라면? 나는 이 사람의 곁을 맴돌며 말을 거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는 존재가 되겠지. 상대의 기억 속에서 함께였던 시간과 기억은 암묵적인 룰로 인해 없던 것들이 될 거야. 마치 아무런 사이도, 어떤 것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건 죽어도 싫어.
"그럼, 오늘부로 이런 관계는 청산... 인 거죠?"
"정확히 말하면, "
"아녜요, 저도 바보 아니에요. 다 알아들었어요."
그러니 마지막 술자리라도 즐겁게 마무리하고 싶다고. 애원하는 얼굴로 당신을 보챘다. 이러면 꼭 한 번쯤은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별 수 없다는 듯 한 숨을 뱉고, 쓰고 있던 모자를 잠시 벗어 머리를 뒤로 힘 있게 넘기다 푹 눌러쓰는 모습이다. 짜증이 나거나 답답하면 하는 당신의 버릇. 그만하자고 한 사람은 당신인데 왜 그런 모습으로 나를 대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왠지 모를 억울함에 코 끝이 찡 하고 전기가 올랐다. 도리어 자신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항상 당신과 행복했는데, 기쁘고, 즐거웠는데. 내 몇 안 되는 행복을 빼앗아 가려는 걸까. 왜 그런 얼굴로 자꾸 나를 화나게 만들려는 거야. 나는 당신에게 상처받아도 아쉬운 말 한 번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복잡한 심경이 들면 멀쩡한 얼굴로 당신과 마주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으니 가방 옆으로 삐져나온 얄팍한 약포지가 보였다. 이런 관계를 시작하고는 거의 먹지 않았던 수면제. 최근엔 자주 꺼내 들지 않았던 가방이라 잊어버리고 중요치 않은 짐은 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럴게 일정이 불규칙 한 직업 때문에 안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적을 정도로 이쪽에선 흔한 약이라 오해를 살 만한 것도 아닌 평범한 약이라. 근데 그런 게 왜 지금 눈에 들어오는 걸까.
"술 더 마실거야, 누님?"
"..."
"... 갈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도리질 쳤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술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똑같은 걸로 더 시킬게, 안주는 마음대로 해도 되냐는 말에 방실거리며 네, 하고 속내 없는 사람처럼 멀끔히 굴었다. 어느새 손에 들린 약포지가 시끄럽게 바스락 대는 소리에 자기가 더 놀라기 전까진 말이다. 자각하고 나면 심장이 여느 때보다 빨리 뛰었다. 살면서 나쁜 짓이라곤 문구점에서 잔돈을 더 거슬러 받았을 때 돌려주지 않았던 것 정도의 아주 사소한 짓뿐이었는데. 머릿속에서는 당신이 등을 돌린 틈에 술잔에 약을 타서, 당신에게 먹이고, 약발이 돌면 취한 사람을 데리고 나가는 것처럼 굴면서 당신을 데리고 나가고... 그 이후의 일 들까지 촘촘히 짜진 스케줄처럼 완벽하게 나쁜 짓이 계획되고 있었다.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취기 때문이 아니라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종류의 흥분감. 하지만 그런 행동을 이렇게 바로 이행하기에는 너무 어설픈 사람이라는 걸 잘 알지만, 오늘이 아니면 다음이 아예 오지 않을 수 도 있다. 상대는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느낌이고, 더 끌어도 얼마 가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물수건 부탁한다는 게, 깜빡했네. 주방 가서 물어보고 올게."
"아, 응. 기다리고 있을게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마지막이야. 평생을 멍청하고 착하게 살았으니까 하늘도 눈 감아주실 거야. 그렇게 당신이 자리를 뜨면 눈앞에는 널브러진 안줏거리들과 수저들, 휴짓조각들, 답답했는지 빼어둔 몇 개의 액세서리, 지갑 그리고 마시다 만 맥주잔이 보였다. 분명 우리 방에서 주방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지만, 지금 약을 뜯어서 당장 넣는다면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마음을 먹으면 서로의 목소리를 가로막던 음악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바쁘게 뛰는 심장소리만 쿵, 쿵- 하고 귓가에 맴돈다. 얇은 약포지가 요란스러운 소릴 내며 찢어지고, 작은 알약 하나는 라라의 새하얀 손 위로 떨어진다. 이제 잘 녹게 톡 부러트려서, 조금 저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시물레이션 하며 몸을 느릿하게 움직인다. 눈을 아무리 크게 떠도 금세 방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에 바로 앞에 있는 물건에 초점도 맞지 않고, 작은 약을 든 손은 바르륵 떨어대는 바람에 몇 번이나 손을 겹쳐 잡아 진정시켰는지 모른다. 화려한 네일을 한 손톱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알약을 양손으로 힘주어 겨우 부러트리면 경쾌하게 똑- 하고 마찰음을 냈다. 다시금 문이 열리지 않았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는, 도톰한 입술을 깨문 채 잔 위로 손을 털었다. 맥주에 빠진 약은 자신이 주저하던 시간이 우스울 정도로 순식간에 기포와 함께 사라졌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걸! 약을 탄 티도 안 나. 이렇게 간단한 걸 못하고 있었다니. 아직 당신이 이 맥주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날아갈듯한 기분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을 뿐인데.
"우-와, 누님 약 탄거야?"
"어?"
"대범하네, 왠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라 잠깐 자리를 비워줬더니 깜찍한 행동을 하고 있고-"
"아,... 그, 그게."
"그럼 이제 마시면 되나?"
"네?"
두려움, 무력감, 공포, 후회,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머릿속을 잔뜩 헤짚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기분은 수치스러움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제 계획을 실행했다고 기뻐하고 있었는데.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첫 단계로 자발적으로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당신이 깔아 둔 덫이었고, 보기 좋게 걸려든 자신이 얼마나 우스울까. 그런데 그걸 마신다는 말은 놀리기라도 하는 건가?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나 가볍고 우스운 존재였던 걸까. 밉지만, 미워할 수가 없는 자신이 야속했다. 두 사람의 감정이 도합 100이 돼야 한다면 당신이 10이나 20, 자신은 100, 혹은 그 이상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니까.
"... 신고해요."
"뭐 하러."
테이블 위에 있던 잔을 치우려 들었지만, 낚아채는 상대의 손이 더 빨랐다. 일어선 채로 자신을 놀리듯 잔을 흔들고 있지만 웃지는 않는 얼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약이 든 술은 낚아챈 속도보다도 더 빨리 상대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빠진 얼굴을 한 채 당신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제 얼굴을 본 건지 무시무시했던 표정이 무색하게 캬핫 대며 요란스럽게 웃어서.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자리을 박차고 일어섰다.
"그걸 진짜로 마시면 어떡해요??"
"먹이려고 탄 거잖아. 군말 없이 먹어줬으면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해야 하는 거 아냐?"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어울려 줄 테니까,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잠들기 직전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